공부도둑
심각한 이야기, (2008/04/27 16:58)
어려운 문제다.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편의에 따라서는 안된다. 아래는 좋은 답안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감곡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시면 내가 미적분을 이해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이제는 아버지께 미적분을 가르쳐드릴 수도 있다고 말씀드릴 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경쟁상대로서 아버지를 넘어서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고, 아버지는 이제 나한테 즐겁게 져주는 순간이었다. 과연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시면서 기꺼이 나한테 배우시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을 함께 학습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서로 갖지 못했고, 또 내 이해 자체가 그다지 깊지 못해 결국 아버지께 이것을 완전히 이해시켜드리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훨씬 쉽게 설명드릴 수 있었겠지만 그때만 해도 나 자신이 겨우 이해했을 뿐 아직 남을 이해시키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나는 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배움을 위해서라면 나이 어린 자식에게 배우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학구적 자세가 그것이다. 남 앞에 머리 숙이고 배운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자신이 직접 수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아버지는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내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내가 이 시험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릴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나로서는 이번 대학입시가 매우 중요한 관문이 되는데, 여기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릴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내가 합격하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이라면 그렇게 해달라고 해서 안 될 것이 없겠지만, 내가 합격하면 누구 하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나를 붙여달라는 것은 누구 하나를 떨어뜨려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가 아닌가? 내 앞에 빵 조각이 하나 있는데 내가 먹으면 동생이 먹을 게 없고, 동생이 먹으면 내가 먹을 게 없을 때 나는 내가 먹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릴 것인가? 결국 나는 공정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 상대가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인데 내가 합격한다면 이는 옳지 않은 일이니 단지 누구 하나 실수해서 순서만 뒤바뀌지 않게 해달라는 것 이상 더 드릴 기도가 없었다.

나는 한 개체로서 10년, 20년 혹은 60년, 70년 전에 출생한 그 누구누구가 아니라 이미 40억 년 전에 태어나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살아온 온생명의 주체이다. 내 몸의 생리 하나하나, 내 심성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이 40억 년 경험의 소산임을 나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 진정한 나이는 몇 십 년이 아니라 장장 40억 년이며, 내 남은 수명 또한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아니라 적어도 몇 십억 년이 된다. 내 개체는 사라지더라도 온생명으로 내 생명은 지속된다. 지금 나는 오직 ‘현역’으로 뛰면서 온생명에 직접 기여할 기회를 누리는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좀더 큰 의미의 생명 그리고 좀더 큰 의미의 ‘나’는 앞으로도 몇 십억 년 혹은 그 이상으로 지속될 온생명이 된다. (장회익-공부도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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